초여름밤에 떠나는 바흐행 트람

2017/08/23

 
6월 초, 올해도 어김없이 바흐 페스티벌을 알리는 하얀 천막사가 시내 중앙에 들어섰고 현수막도 시내 거리 곳곳에 보인다. 천막사 안을 기웃거리며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니 올해의 주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EIN SCHOEN NEW LIED”- MUSIK UND REFORMATION
“아름다운 새 노래” – 음악 그리고 종교개혁
 
올해는 독일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과 관련된 바흐의 음악세계를 페스티벌의 주제로 삼았다. 페스티벌 안내 책자를 훑어보며 몇몇 관심 가는 음악회들을 찜 해 두고 천막사를 나왔다. 천막사 뒤로는 바흐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토마스 교회가 한눈에 들어왔다. 교회 앞 나무들 위로 높이 솟은 교회의 모습이 마치 이 땅에 발을 딛지 않은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토마스 교회 @ YH Park

 

 

문득 4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토마스 교회에 처음 들어섰던 그날. 바흐가 연주하던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제단 바닥에 안치되어 있는 바흐의 무덤을 보며 바흐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바흐도 걸었을 테고 내가 보는 저 오르간으로 연주하고 지휘했겠지… 아직 추운 3월의 그날, 교회 뜰에 세워진 바흐 동상을 와락 껴안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재촉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대체 바흐가 왜 그렇게 대단한 거야?"라고 내게 물었다. 

 

'…응? … 그건 바흐가 대위법을…. 그러니깐…아으… 날씨가… 추… 추워서 동상이 얼음장이네...;;;’ 내 머릿속에 분명 지우개가 있다.

 

 

바흐, 그리고 라이프치히

바흐는 서른여덟 살에 이곳 토마스 교회 합창장의 자리를 얻어 라이프치히로 왔다. 그리고 1750년 그가 예순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27년간 교회 음악 책임자로 그리고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교회 칸타타(교회 성악곡)만 160여 곡, 이 외에도 피아노를 위한 곡들 그리고 <카페 칸타타>와 같은 세속 곡들까지 많은 곡들을 남겼다. <카페 칸타타>의 배경이 된 카페는 지금도 여전히 시내 골목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주민들과 여행자들은 오랜 추억을 간직한 이 곳을 즐겨 찾는다. 

 

바흐는 최후의 대작인 <푸가의 기법>(BWV1080)을 작곡하다가 이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바흐가 잠든 토마스 교회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교회를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이 동상은 바흐의 인생을 한눈에 보여주는데, 그의 등 뒤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서 있고 오른손에는 악보가 쥐어져 있다.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서 그의 음악 인생을 보여준다. 그런데 동상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하나 있다. 외투의 한쪽 주머니가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조각가의 실수는 아닐 텐데, 어째서 그런 걸까? 빈털터리란 표현이란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빈털터리라는 표현이 통하는 게 재미있다. 바흐는 2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교회 합창장의 적은 봉급으로는 턱도 없어 따로 곡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평생 천 여곡에 이르는 바흐의 왕성한 창작에 얽힌 그의 인생사 한 면을 알고 나니 악보를 꽉 쥐고 근엄하게 서있는 바흐가 한층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라이프치히에 와서 알게 된 바흐에 관한 또 흥미 있는 사실이 있다. 지금은 바흐가 세계가 다 아는 음악가이지만, 사실 바흐는 하마터면 후대에 영영 잊힌 음악가로 남을 뻔했다고 한다. 바흐의 생애 후반기는 새로운 음악 사조인 고전파 음악이 태동하면서 그의 음악은 젊은 음악가들에게 구시대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바흐는 그의 사후에 사람들로부터 차츰 잊혔다. 사후 80년 가까이 바흐의 악보는 분실되거나 어딘가에 처박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까마득히 잊힌 바흐의 음악에 다시 빛을 비춘 이는 바로 그보다 한 세기 후 사람인 멘델스존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부임한 멘델스존은 1892년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복원해 연주했다. 이 연주가 큰 호평을 받으며 바흐의 음악은 무덤에서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그런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멘델스존이 바흐의 곡을 재발견하게 된 계기가 좀 웃기다. 멘델스존과 그의 하인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사 왔는데, 나중에 보니 고기를 싸고 있던 종이가 악보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바로 바흐의 <마태수난곡> 악보였던 것이다.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바흐의 곡이 완전히 잊혀진 채 알아봐 주는 이 없이 나뒹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바흐가 하늘나라에서 멘델스존을 만났다면 고마운 마음을 전했을 것 같다. 

 

 

바흐 페스티벌, 그리고 정치 

이렇게 우연과 필연이 만나 바흐는 독일이 사랑하고 자랑하는 음악가가 되었다. 독일의 음악인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바흐와 그의 음악을 기념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0년 라이프치히에서 신 바흐 협회 (Neue Bachgesellschaft)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1년에 베를린에서 첫 번째 바흐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바흐 페스티벌은 이후 나치 정권과 동서독 정권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나치 정권 시기에는 새로운 음악 형식이 생겨나는 전위적인 시대였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보수적이며 고전적인 음악에 집착했다. 히틀러는 독일인의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음악, 인간의 감정을 뒤흔들며 민족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추구하는 음악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연설의 한 대목이다. 
 
 
 

우리 민족의 발전과 인내를 위한 보편적 법률을 음악 분야에도 적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기교적으로 혼란을 유발하는 음악으로 청중을 당황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청취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제압하는 것이다” (1938년‘문화 연설’)

 
 
 
히틀러에게 음악은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예술이었다. 바흐는 독일의 클래식을 대표하는 음악 영웅이지만 나치가 원하는 민족의 영웅이 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바흐 음악의 중심을 차지하는 기독교 신앙이 문제였다. 그러나 바흐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치 정권은 바흐의 음악에 담긴 신앙심을 가리고 대신 민족정신을 불어넣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째는 그가 다른 독일 음악가에 비해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두 번째는 바흐의 음악에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가미하기 위해 바흐 음악의 가사들을 바꾸어 연주하게 했다. 이렇게 바흐와 그의 음악에 민족성이 부각되면서 바흐는 ‘독일인 중의 독일인’, ‘게르만족의 우수한 예술성을 물려받은 순혈 독일인’, ‘민족적인 음악가’로 포장되었다.

 

동서독 분단 시기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치 정권이 바흐를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다면, 동독 정권은 그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한 인물로 세계에 내세우려고 애썼다. 이를 위해 동독 정권 역시 바흐 음악에 가차 없는 매스질을 해 바흐 음악의 정체성을 왜곡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 때문에 통일되기 직전까지 26번의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동안 페스티벌의 명칭도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Leipziger Bachfest”(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벌)-“Bach Tage”(바흐의 날)-“Bach-Feier”(바흐 축제)-“Bach Festwochen”(바흐 축제주간)-“Reichs-Bach-Fest”(제국 바흐 축제).
 
 
 
 
 
하지만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독일의 문화예술인들은 바흐 음악과 페스티벌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도 당시 신 바흐 협회는 둘로 나뉘지 않고, 양쪽 인사들이 모두 구성원으로 참여해 하나의 조직을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단일 조직을 통해 정치적 상황이나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공동으로 바흐 페스티벌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통일되기 직전까지 바흐 페스티벌은 매년 동독과 서독의 도시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개최되었다. 바흐의 음악과 이를 사랑하는 이들의 값진 노력이 수십 년간 장벽이 가로막고 있던 동독과 서독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음악이 단순히 예술적 가치를 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음악과 예술의 중요성을 한번 더 새롭게 느끼게 된다. 현재 남북한을 잇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체제와 정치적 갈등을 넘어 예술을 존중하는 독일의 문화가 더욱더 부러워진다.

 

 

바흐, 그리고 음악

동서독의 장벽이 무너진 후 비로소 바흐와 그의 음악은 비로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바흐 페스티벌도 이제 어떠한 정치적 이용이나 간섭 없이 온전히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6월의 초여름 햇살 아래 바흐 페스티벌은 꽃들의 색깔과 향기만큼이나 다양한 행사들로 꾸며진다. 바흐의 교회 음악 공연 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공연과 참여 이벤트, 근교 아름다운 성으로의 음악 산책, 학술 행사, 바흐의 음악을 새롭게 해석한 재즈, 발레,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연주와 공연들이 축제를 다채롭게 수놓는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노인까지, 바로크적인 클래식함부터 최신 유행 음악 장르까지, 페스티벌이 담아내는 음악의 폭이 상당히 넓은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이들 음악을 무료로 또는 한국 돈으로 5천 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도 음악 본래의 정신을 잘 담고 있는 것 같다.
 
 
 

 

시원한 여름밤, 우여곡절의 긴 세월을 지나온 바흐의 음악이 시민들로 가득 찬 광장에 울려 퍼진다. 지금 광장에는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재즈 색소폰 연주자인 죠슈아 레드맨(Joshua Redman) 밴드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은 서서 맥주와 와인을 홀짝이며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눈빛을 교환하며 재즈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다. 아빠의 무등을 탄 아이는 아빠 머리를 잡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노인들은 의자에 앉은 채 지팡이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 

 

연주자들 뒤 무대 벽을 장식하고 있는 바흐의 초상이 보인다. 바흐가 이 공연을 보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자신의 대위법적 선율과 재즈의 선율이 묘하게 얽힌 지금의 곡을 듣는다면 노발대발할까? 번쩍이는 보석 신발에 닭 벼슬 머리를 한 오르가니스트가 전자 오르간으로 자기 곡을 연주하던 어젯밤에는 기분이 어땠을까? 무대 위 공연 너머 바흐의 초상을 보고 있자니 오늘따라 유난히 인자해 보이는 바흐가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오늘 밤만은 이 재즈 선율에 바흐도 한쪽 구석에서 흥얼대며 함께 몸을 흔들고 있겠지.

 

 

 

참고자료: http://www.bachfestleipzig.de/de/bachfest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동독 안 위험해?"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지겹도록 듣는 말, <라이프치히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독일 통일 이후 편견에 쌓여있는 '구 동독 도시', 라이프치히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통일 이후 우리는 북한의 도시에서 그 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을까요? 라이프치히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도 한 번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 https://brunch.co.kr/@leipzig

글: 최인혜 ㅣ leipzig.korea@gmail

사진: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ㅣ leipzig.korea@g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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