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대학의 부끄러운 역사

2017/03/29

 

수업은 없습니다. 길거리에 나가 시위에 참여하세요!

 

 

지난해 1월 라이프치히 대학교 학장의 이름으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반 이슬람/외국인을 외치는 레기다(Legida) 시위와 그에 맞선 레기다 반대 시위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월요일 오후 대학의 모든 수업을 휴강한다. 그날 열리는 레기다 반대 시위에 참여하라는 이유에서다.

 

뭐? 지금 학교가 학생한테 메일을 보내서 수업을 안 할 테니 시위를 하러 길거리에 나가라고 하는 거야? 대학의 이름으로 날아온 그 메일 내용을 나는 몇 번이고 읽었다. 

 

"라이프치히의 대학들은 앞으로도 자유로운 생각의 교류와 새로운 것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열린 분위기의 도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 라이프치히의 대학장들은 이런 불관용과 외국인 배척 사상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우리는 레기다에 반대하는 여러 시위에 참여할 것입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그 단호한 결정과 가치 표현에 나는 잠깐이지만 전율을 느꼈던 것 같다. "역시 독일 대학이네" 하면서 이 학교에 잠시나마 자랑스러움도 느꼈다. 그리고 나도 기꺼이 시위 군중의 하나가 되어 길거리로 나섰다. 

 

600년의 역사를 지닌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하지만 언제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 역사의 상처에 짓이겨져 오히려 치욕스러운 기억과 기록을 남겨야 했다. 1409년 문을 연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뒤를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지금 라이프치히 대학 본관은 막 공사를 끝내고 깨끗한 건물이 들어서있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들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독일인데, 600년이 넘은 대학 치고는 너무 현대적인 모습이다. '건물이 너무 낡아서 새로 지었나?'라고 쉽게 넘기기 쉽지만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독일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전쟁과 나치, 그리고 동독 공산당 깃발을 거쳐 통일 이후의 오늘까지, 라이프치히 대학교처럼 독일 역사의 상처를 곳곳에 새긴 대학교가 또 있을까. 

 

 

 

 l 2016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본관 전경ㅣ 

 

 

 

나치, 그리고 동독에 충성했던 대학과 교수들

 

1945년, 라이프치히 대학은 전쟁의 잔해 속에 놓여있었다. 대학 건물의 60퍼센트가 파괴되었고 소장 도서의 70퍼센트가 소실됐다고 한다. 전쟁 이전 라이프치히 대학에는 나치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유대인 교수들은 쫓겨났고, 수많은 교수들은 나치에 복종하거나 오히려 나치당 당원으로 가입해 적극적인 충성에 나섰다. 그리하여 교수직을 지켰다. 당시 몇 안 되는 저항 학자였던 테오도어 리트(Theodor Litt)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

나는 확신한다. 만약 독일 교수들이 처음부터 그런 파렴치한 것들에 품위 있게 저항했다면, 그러한 많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금 독일 학계에서 발견되는 이런 품위 상실의 모습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 (1934)

"

 

 

전쟁이 끝나고 라이프치히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를 받아들인 동독의 지배 하에 놓였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이제 나치를 상징하는 갈색 재킷을 벗고 붉은 재킷을 걸쳐야 했다. 동베를린의 훔볼트대학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은 동독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고 붉은 사상가들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기능했다. 그리고 라이프치히 대학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카를 마르크스 대학 (Karl-Marx-Universität)'

 

카를 마르크스 대학에는 새로운 학문이 생겼다. 사회학과(Gesellschaftswissenschaft), 오늘날의 사회학과와는 좀 다르다. 오로지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회주의 사상을 견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생겨난 학과다. 저널리즘학과도 새로 들어섰다. 동독 공산당에 충성할 기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회주의 저널리즘을 위한 용어 책도 펴 냈다. 동독 시절 활동하던 기자들은 대부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저널리즘학과 출신이었고, 그곳을 "붉은 사원(Rotes Kloster)"라 불렀다.

 

동독의 지배 하에 놓였지만 대학교는 학자적인 교류를 잊지 않았다. 대학은 문학과 교수로 당대 저명한 학자였던 한스 마이어(Hans Mayer), 철학과에는 에언스트 블로흐(Ernst Bloch)를 받아들였고 동서독 간의 학자 교류를 허용했다. 처음엔 그랬다. 한스 마이어의 40호 강의실에는 학생들이 빼곡히 찼고, 서독의 지식인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동독은 폐쇄되고 있었다. 이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둘러싼 동독의 경계와 감시도 심해졌다. 1963년 서독의 한 회의에 참석한 한스 마이어는 결국 동독으로 다시 돌아가길 포기했다.

 

1968년 5월 30일, 라이프치히 시내 한 중간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전쟁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았던 대학 교회 파울리너교회(Paulinerkirche)가 폭파되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폭파된 이유는 간단했다.

 

"Das Ding muss weg! (저건 없애야 해!)" 

 

공산당 서기장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운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의 한마디에 500년간 라이프치히 대학의 삶 그 자체였던 대학 교회가 공중분해되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내를 돌며 침묵시위를 이어나갔고, 일부 그룹은 라이프치히 공산당사에서 담당자와 대화를 요청하려고 애썼다. 

 

'라이프치히 시민 여러분! 대학 교회 폭발 계획은 문화적 수치입니다!' 손으로 쓴 전단이 나붙었다.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폭발 작업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라이프치히 시민들은 150미터 밖에서 라이프치히 도시의 정체성이었던 그 대학 교회의 붕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학자들은 그것을 두고 "교회 살해"라고 불렀다. 교회가 사라진 자리에는 직사각형의 사회주의식 건물과 거대한 마르크스 기념 동상이 세워졌다. 카를 마르크스 대학은 그 이름에 걸맞은 대학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 

 

 

 

 

 

 

 

 

 

 ㅣ폭약에 무너지고 있는 라이프치히 대학 교회 @Bundesarchivㅣ

 

 

 ㅣ 교회가 폭파되고 사라진 자리에 세워진 사회주의식 대학 건물과 마르크스 기념상 @dpa ㅣ

 

 

 

학생들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었다. 동독 초기 시절 라이프치히 대학교 학생회장이었던 볼프강 나토넥(Wolfgang Natonek)은 동독 정부의 대학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비방 선전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1948년 또다시 학생회장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그 해 11월 그는 결국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56년까지 복역했고 이후 사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학내 자유선거를 위해 전단을 뿌렸던 허버트 벨터(Herbert Belter)는 사형 선고를 받고 1951년 모스크바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저항하고 희생되었던 학생들을 기리는 곳이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다.

 

 

 

 

 

ㅣ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현재 모습. 오른쪽 흰 건물은 동독 시절부터 있던 건물을 없애지 않고 재정비했다 ㅣ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이야기를 찾으면서, "독일 통일에 대학이 분명 큰 역할을 했을 거야!"라고 믿었다. 대학이라는 곳이, 지성이 모인 곳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통일이 임박할 때까지, 카를 마르크스 대학 교수의 80퍼센트가 동독 공산당 당원이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며 체포되고 있었던 그때 말이다. 라이프치히에서 평화혁명을 이끈 수많은 사람들은 교수나 지식인들보다 말 그대로 군중들이었고, 시민들이었다. 통일 이후 중부독일 방송(MDR)은 이렇게 적고 있다. 

 

라이프치히가 평화혁명의 중심이 되었을 때, 실질적인 자극이 대학으로부터 나왔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대학으로서는 뼈아픈 이야기다. 물론 대학의 구성원인 학생들, 그리고 일부 교수들은 평화혁명의 시민들 속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의 80퍼센트가 동독 공산당원이었던 그 대학 조직은 대학 앞에서 넘실거리던 평화 촛불의 행렬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통일 이후 교수를 포함한 1만여 명의 직원들 중 7000명이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 자리를 대부분 서독에서 온 학자들이 채웠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나치에 충성하다 또 동독에 충성하다 통일 이후까지도 자리를 지킨 이들이 있을지는 말이다. 

 

통일 이후 라이프치히 시내 곳곳에 있던 마르크스 동상은 철거됐다. 하지만 이 대학 정문에 붙어있는 거대한 동상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폭파된 교회를 기려 마르크스 동상 위에 과거 교회 모습으로 붉은 철근을 세워놓았다. 재독 작가 강유일 교수는 이를 두고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마르크스 조각과 교회 상징물은 그렇게 서로 뒤엉킨 채 시대의 이념에 따라 진저리 치는 가치의 교란을 잘 웅변해 주고 있다"

 

 

 

 

 

 l 통일 직후 대학의 모습. 마르크스 동상 위에 폭파된 교회를 기리는 붉은 철근이 보인다 @Sylvia Dorn /Universität Leipzig l

 

 

 ㅣ지금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한 모퉁이로 밀려난 마르크스 기념상.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ㅣ

 

 

 

2016년 오늘, 라이프치히 대학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마르크스 동상은 라이프치히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차마 깨부수지는 못했던 역사의 흔적을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그대로 옮겨 대학 한 모퉁이에 전시하고 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외딴곳에 그 마르크스 동상은 쓸쓸히 서 있다. 그리고 그 길고 힘들었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지금의 현대적인 건물로 재 탄생했다. 이 반짝거리는 새 건물은 전쟁과 이념에 짓이겨진 도시, 라이프치히의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지금 이렇게, 더 열심히 다양성과 관용의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카를 마르크스' 표기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습니다.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동독 안 위험해?"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면서 지겹도록 듣는 말, <라이프치히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독일 통일 이후 편견에 쌓여있는 '구 동독 도시', 라이프치히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통일 이후 우리는 북한의 도시에서 그 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을까요? 라이프치히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이야기도 한 번 상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 https://brunch.co.kr/@leipzig

글: 이유진 ㅣ leipzig.korea@gmail.com

사진: dpa/Universität Leipzig/Bundesarc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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