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근로 계약서와 인간성의 회복

2017/03/23

 사실 독일에 와서 회사에 취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잘 다니던 회사를 어렵게 그만두고,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만큼,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다-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 보기)

 

처음 와서 몇 달 간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고 나름 하고 싶은 일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의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돈벌이가 슬슬 필요했고, 제일 마지막 옵션이었던 취직에 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주제도 모르고 취직을 마직막 옵션에 넣었다니....

 

 

무급으로 시작

여러 번의 실패로 좌절하던 차에 정말 정말 우연히... 우연하게 기회가 찾아왔다.

 

"보수는 보장 못하지만, 그래도 인턴이라도 한 번 해볼래? 정직원이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내가 나중에 추천서라도 써 줄 수 있으니까."

 

독일어 수업이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려고 들린 곳에서, 나와 처지가 비슷했던 브라질 사람을 만났고, 외국인으로서의 동병상련이었던지, 그가 영업부장으로 있는 회사에서 우선 3개월 간 무급으로 인턴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후 기적 같이도 정식 계약 제안을 받았다. 서류 처리 등이 두 달이 걸려 결국 무급 3개월을 채우긴 했지만...

 

 

한국 회사와는 뭐가 다를까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취직이었지만, 오랜만에 사무실 출근을 하니 한 동안 꽤나 설레었다. 한 동안 장인어른을 도와 밭에서 몸 쓰는 일을 하다가 내가 여전히 사무실에서도 쓸모가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지역의 작은 회사이지만 이렇게 독일 회사에 취직이 되었으니 그동안 몸 담았던 한국 회사와는 어떻게 다른지,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그리고 한국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개선되면 좋을지를 한 번 겪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받던 날, 그들은 근본적인 마인드 자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약서 항목들은 대부분 한국과 비슷했으나, 인상적인 계약서 항목 세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상적인 계약서 항목들

1) 휴가일수와 사용 권리

첫 번째는 계약 첫 해부터 휴가 일 수가 워킹데이 기준으로 26일이다. 그리고 가급적 2주 이상 연속으로 쓰지는 않으면 좋겠다는 (고마운?) 코멘트가 붙어있다. 한국에서는 20일 전후로 연차가 올라갈수록 조금씩 늘었다. 큰 차이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휴가를 쓰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여름휴가든, 겨울 휴가든, 심지어 신혼여행도 5일 이상 쓰면 눈치를 주었다. 중간중간에 아프거나 개인적인 사유로 며칠 쓰면 연말에는 5일 이상이 꼭 남았던 걸 생각하면 계약서에도 있는 내 휴가 쓰는데 왜 그리 눈치를 봐야 했나 싶다.

 

2) 아플 수 있는 권리

두 번째는 아파서 회사에 못 나오더라도 의사 진단서를 가져오면 개인 휴가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항목이 있기는 있었지만 며칠 이상 입원을 해야 하고, 병가를 쓰면 그 기간 동안은 급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개인 휴가를 썼던 기억이 있다. 대신 여기는 이 항목을 악용하지 않도록, 일 년 동안 아파서 병가를 쓰지 않으면 연말에 500유로의 보너스를 주는 인센티브가 있다. 아파도 참고 학교에 가는 것이 배우는 자의 도리라고 배웠기에, 일을 할 때도 아파도 꾸역꾸역 회사에 나갔다. 그런데 여기는 아프면 나오지 말고 휴가도 따로 주니, 너무 당연한 건데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구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느낌이랄까...

 

3) 자율성에 대한 권리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하이라이트가 '믿음 타임제 (Vertrauensgleitzeit)'이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 없이 개인 사정에 맞게 조정하되, 집중 근무 시간인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회사에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고, 이는 한국에서 이전 회사에서도 플렉서블 타임제라고 비슷한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곳의 '믿음 타임제'에 추가되는 것은 홈 오피스이다. 일하는 시간은 스스로 조정하고, 상황에 따라 상사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건은 모든 직원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다른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해 당분간 아이를 혼자 봐야 하는 내 상황을 알고서는 배려를 해 준 것이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 하원을 해주고, 혹시 아이가 아플 때는 집에서 일하면서 돌봐줄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일 하는 시간을 통제하지 않을 테니 성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무서운 말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의 신뢰가 그만큼 두터운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조건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도 잘 못 하는 외국인에게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조건이라,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우... 한국 회사에서는 직원의 아이들 상황까지 상관하지는 않아요."

 

그러자 계약서를 한 줄 한 줄 설명해주던 보스가 계약서를 내려놓고는, 내 눈을 쳐다보며 짧지만 감동적인 대사를 날린다.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에요!!"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오후 3시 반에서 4시면 퇴근한다. 그러니 점심시간도 스스로 줄여가며 집중하고 능률도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업무 시간이 짧으니(?) 일을 하느라 지치지 않는다. 몸이 소진된다는 느낌이 없었다. 수요일만 되면 목요일 금요일이 천만금처럼 길게 느껴지는, 화장실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금요일은 오후 두시면 이미 회사 전체가 한산하다.

 

하던 일을 딱 끊고 나오는 습관이 들지 않아 항상 급하게 나와서 어린이집으로 달려가곤 한다. 밤늦게 남아 바짝 야근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하루 이틀이 더 걸려야 하지만, 조금씩 효율적으로 일 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 같다.

 

나에게 불리한 조건은 없는지 꼼꼼히 읽어봐야 했던 차가웠던 이전의 근로계약서들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연봉 액수`였다.

 

딱딱해 보이지만 따듯한 독일의 근로계약서에 연봉 액수는 덤으로 느껴진다. 이전의 절반 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인간성을 존중받음으로써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은 기분 탓이리라...

 

 

 

 

 

 

 

 

 

 

[독일에서 일하기]
한국 그리고 독일, 일 그리고 삶, 관성대로 살지 않기
 

글 : 송현욱 (hionuk song)
홈페이지 : https://brunch.co.kr/@songhion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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